쇼핑 없이는 못살아!

#사례1

직장인 방미자(가명)씨는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는다. 옥션과 G마켓(온라인장터)에서 옷이나 화장품 가전제품을 보다가 가격이 싸거나 할인쿠폰이 눈에 띄면 바로 신용카드를 꺼낸다. 방씨가 이런 식으로 온라인장터에서 쓰는 돈은 한 달에 50만 원 선. 컴퓨터만 켜지 않았으면 사지 않았을 의류나 소품, 소형 가전제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화면에 싼 제품이 나타나면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털어놨다.

#사례2

두 딸을 모두 결혼시킨 주부 김지숙(가명)씨의 요즘 유일한 취미는 쇼핑이다. 그러나 지출이 자꾸 커지면서 한 달 카드 값이 남편 월급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카드를 빼앗자 김씨는 딸의 명의로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수 천 만원으로 불어난 카드빚에 김씨의 가정은 파탄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백화점에 가서 고급 옷, 보석류 등을 쇼핑하다 보면 왠지 귀부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면서 “하루라도 쇼핑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불안감에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례3

주부 이현정(가명)씨는 홈쇼핑이 문제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고 나면 온종일 홈쇼핑 채널에 시선 고정이다. “이제 3분 남았습니다. 빨리 서두르세요”란 쇼핑호스트의 말만 들으면 가슴이 콩닥거리고 “정말 효능이 탁월해요”란 말에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를 두드린다고. 매진 임박 타이머가 돌기 시작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10개월 무이자 찬스를 놓치는 건 어쩐지 손해 같다. 거의 매일 한 가지 이상 구매하다 보니 카드 대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 카드 대금 청구서는 남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위 3가지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쇼핑중독에 걸린 여성들의 사례이다. 위의 예처럼 쇼핑중독은 이미 사회문제로 대두되며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특히 TV홈쇼핑과 인터넷 쇼핑이 일반화되면서 시중보다 싸게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점에 현혹된 이른바 ‘중독성 쇼핑족’들이 늘고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쇼핑중독은 비단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쇼핑중독으로 인해 심각한 가정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 때론 헤어날 수 없는 중독증이 끔찍한 범죄로 이어져 더욱 문제가 된다. 몇 년 전 우울증과 쇼핑중독증으로 5000여 만 원을 날린 한 20대 여자가 자신을 꾸중하며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는 이유로 친어머니를 청부살해한 사건은 쇼핑중독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국소비자학회 성영신 교수는 “쇼핑중독은 최악의 경우, 돈이 없거나 누군가에 의해 물건을 사지 못하게 되면, 도벽이나 살인 등 심각한 범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쇼핑중독자 수만 명에 달해

쇼핑중독증은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사들이고, 쇼핑이 불가능해지면 심리적, 육체적 부작용에 시달리는 상태를 말한다. 한번 구매 충동이 오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마구 사고, 산 물건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면서 쇼핑이 불가능해지면 짜증이 나고 불안해진다.
쇼핑중독증 환자들은 물건을 사기 직전엔 긴장이 되다가도 사고 나면 속이 후련해져 쇼핑을 멈출 수 없다고 호소한다. 정서불안, 소화불량, 두통 등에 시달리고 심하면 약물의존, 식이장애, 우울증 등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성균관의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사도 갚을 능력이 있다면 병이 아니지만, 이로 인해 법적, 가정적, 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면 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쇼핑중독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는 이미 지난 1990년 초부터 심각하게 대두된 사회문제였다. 이 때문에 쇼핑중독 전문 클리닉이나 쇼핑중독 치료 및 연구 모임도 일반화 돼 있다고. 그러나 국내에는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실정이라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최근 몇 년 간 한국의 대표 백화점인 L백화점을 동네 슈퍼처럼 거의 매일 드나들며 물건을 사들이는 쇼핑중독자가 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L백화점 뿐 아니라 다른 백화점까지 감안하면 쇼핑중독자는 1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돼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게다가 홈쇼핑 등의 고객까지 더하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심각한 쇼핑중독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 입장에서 이들은 최고 단골 고객들이다. 일반 고객들이 평균 두 달에 세 번 정도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을 감안해보면 이들은 쇼핑횟수가 많을 뿐 아니라 구입단가도 적지 않은 고객들이다.

연령별로는 30대가 36.2%, 40대가 34.2%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시간 여유가 있는 30~40대가 70%를 차지했고 20대와 50대는 각각 10%, 19%였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카드 활동 고객 중 최상위층의 매출이 무려 2587억 원에 달하니 구매단가가 높은 단골 고객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며 “단골고객들을 MVG(Most Iuable Guest)고객으로 분류해 별도 공간을 제공하고 회원들 간에 교류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을 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쇼핑도 우울증의 일종

쇼핑 중독은 여느 정신장애와 마찬가지로 유전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과 가족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다.

전문가들은 이를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쇼핑을 하는데서 오는 흥분과 설레임으로 인체 내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분비가 자극되고 이로 인해 일시적인 행복감에 젖기 때문에 쇼핑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남성들은 테스토스테론 호르몬 분비로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쇼핑 충동을 잘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는 기쁨 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은 쇼핑 중독을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진단한다. 쇼핑이라는 행동을 중단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한다면 이는 강박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강박증상은 불쾌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쇼핑중독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쇼핑 강도와 지출을 늘리지 않으면 고조된 기분을 맛보기가 점점 힘들어 결국 경제적 파산을 초래한다. 또한 뒷걱정보다 당장의 욕구 충족, 행위에 앞서 고조되는 긴장감, 구매 직후의 후련함, 다시 찾아오는 충동, 권태와 무료함에 길들여짐, 중독 초기의 희열감 등 진행 양상이 알코올이나 마약, 도박 중독자와 흡사하다.

심리 치료가들은 우울증의 일종으로 쇼핑중독을 분석하기도 한다. 실제 우울증으로 진료 받는 환자들 중 상당수가 쇼핑중독 증세를 보이지만, 쇼핑 중독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또 쇼핑중독자들의 충동구매는 슬프거나 외로울 때 혹은 화가 날 때, 좌절감을 느낄 때 많이 발생한다.

외모로 평가하는 사회문화가 여성의 쇼핑 중독을 일으킨다는 분석도 있다.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 자신을 남들보다 돋보이게 하려는 여성들이 늘고 있기 때문. 실제로 미국 미네소타대가 병원 입원치료를 필요로 했던 심각한 쇼핑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이 주로 사는 물건은 맵시와 관계된 옷, 신발, 보석류 들이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소액의 물건을 다량 구매하기 때문에 중독 가능성이 크다”며 “온라인 쇼핑은 대부분이 할부구매이고 환불도 쉽게 되기 때문에 적은 금액으로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전했다.

쇼핑중독 어떻게 극복할까?

  그렇다면 과연 쇼핑중독에서 벗어나 현명한 소비를 꾸려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우울증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치료하지 못하면 충동구매로 인한 쇼핑중독은 치료 자체가 어렵다고 강조한다. 만약 다른 정신적인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중독만이 문제가 된다고 느낀다면 과감하게 쇼핑을 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쇼핑 습관을 점검해 쇼핑중독이 의심되면 먼저 신용카드를 없애고, 쇼핑은 항상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가톨릭대 성모병원 정신과 채정호 교수는 “쇼핑중독은 행위의 빈도를 줄이는 등 적당히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면서 “중독현상이라는 것은 쇼핑을 계속하게 만들도록 뇌의 호르몬이 변하는 현상이므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쇼핑중독은 정서적 고통을 구매충동 실현으로 대처하려는 심리적 장애이기도 하다. 보다 확실한 치유를 위해선 강박·충동적 성향을 통제해야 하고 우울증과 긴장의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좋아, 좋아, 하지만 안돼.’라고 말하며 충동구매를 경고하는 한 카드회사의 체조 구령식 광고는 모델의 표정과 춤 동작이 코믹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충동구매의 원흉인 지름신을 이런 체조로 퇴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쇼핑중독증을 고치기 어렵다면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쇼핑중독은 여느 중독질환과 마찬가지로 무조건 해결되는 경우가 아닌 것을 명심하자.

글·사진/박경미 기자

박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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